스물여덟의 플로베르, 훗날엔 『보바리 부인』으로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요, 프랑스 문단의 총아로 자리매김할 재능 있는 청년이지만.... 아직은 작가라기보다는, 요즘 말로 잉여짓에 몰두하는 찌질 청년이었을지도? 몇몇 단편소설을 출판하긴 했지만 작가로 제대로 자리 잡은 것도 아니었고, 가업이던 의사가 되는 대신 선택한 법학 공부도 스물세 살에 간질 발작을 하는 바람에 중단하고, 할 수 있는 일은 고향집에 쳐 박혀서 글 쓰는 것밖에 없었죠. 그래서인지 그는 유독 완벽한 문장에 매달렸습니다. 사교 생활마저 마다하고 종~일 책상에 붙어사는 모습은 말 그대로, 문학의 수도승이요, 토굴 속의 곰과 다를 바 없었죠.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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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플로베르, (오른쪽) 플로베르의 친구 막심 뒤캉
"영원한 친구로서 서로 사랑하고 항상 내 마음속에 있을 친구 중 가장 좋은 친구를 만나고 싶은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그렇다. 우리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친구야."

그랬던 그가 1849년 난생 처음 여행을 떠납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꿈꿔 오던 동방여행입니다. 토굴 같은 서재를 떠나 해 뜨는 동쪽을 향해 가는 여행. 일생일대의 대모험이었죠. 고향을 떠날 때 플로베르의 어머니는 집을 나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데, 플로베르는 어머니의 그런 울음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 비슷했다고 적을 정도였답니다. 

이집트와 터키, 예루살렘, 그리고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찍고 다시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오는 여행은 19세기 유럽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환상적인 여행이었죠(플로베르는 1851년 5월 귀국길에 오르기까지, 2년여의 기간 동안 부유한 의사였던 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산을 여행에 거의 다 써 버렸다고 합니다)


재미나게도 플로베르는 이 여행을 위해 위장취업(?)을 합니다^^;; 프랑스 농림부의 공무원 신분을 취득하는 건데요. 그렇게 해서 외국을 여행할 때 프랑스 정부를 대표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편의를 얻을 수 있는 거지요. 그 대신, 돌아갈 때, 여기는 콩이 얼마, 저기는 말[馬]이 얼마, 어디부터 어디까지는 배로 몇 시간 같은 지역정보를 모아다 줘야 했다네요. 


물론 ‘작가’인 플로베르가 그런 것을 열심히 했을 리가 없습니다. 여행의 첫 경유지인 이집트에서 금세 임무를 포기해 버리기로 작심해 버린답니다. 하하~ 여하간 그렇게 해서 1849년 11월 4일, 플로베르와 그의 친구 막심 뒤캉은 우편물 증기선 ‘나일 호’를 타고 11월 15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본격 여행 준비를 마친 후 이듬해 2월 돛단배를 빌려 상(上) 이집트로 여행을 떠납니다. 낭만적이죠? 이 넉 달간의 여행길에서 어머니와 절친들 등에게 시시때때로 보낸 편지를 엮은 것이 바로 “작가가 사랑한 도시”의 『나일 강』입니다. 


플로베르는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고민했지만, 낯선 풍경과 다채로운 색의 향연에 몸을 내맡기고 오로지 ‘눈’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친구인 막심은 당대 첨단과학의 산물인 카메라를 펼쳐놓고 곳곳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부산을 떤 데 반해, 플로베르는 여행지마다 만나는 대상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메모를 했습니다. 햇빛의 변화에 따른 미묘한 색조의 차이, 습도와 온도에 따른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사진이 담지 못한 감각을 글로 써 간 것이죠. 플로베르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독 ‘나태함’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몸의 여행’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는 얘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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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이 사용했던 카메라
"사진 찍는 데에 쏟아붓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막심이 어떻게 쓰러지지 않는지 모르겠네요. 게다가 사진도 아주 성공적입니다."

나중에 ‘거장’이 된 플로베르는 자신의 작품에서 작가의 모습을 배제하려 했습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겸손한 안내자처럼 숨을 죽이고 있어야 독자가 제대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 대신 정확한 묘사와 엄밀한 문장에 치중했습니다. 소설을 고치고 또 고치는 바람에, 출판까지 된 작품은 불과 6편밖에 안 된답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그가 남긴 편지글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숙고하는 소설과 달리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소설가가 아닌 한 여행자의 자연스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직업 작가로서 이런 개인적인 편지가 출간되는 것이 부담되었던지, 그의 편지는 상당수 폐기되었고 여행기도 사후 60여 년이 지난 후 일정 부분이 삭제된 상태로 공개되었답니다. 

플로베르가 절친 루이 부이에한테 쓴 편지에는, 에스나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무희(사실은 고급 매춘부)의 집에서 보낸 하룻밤이 묘사됩니다. 수도승 같은 이미지와는 딴 판이죠? 관능적인 무희의 춤, 낯선 삼현궁 가락에 취한 하룻밤은 강력한 환락 속에 오히려 짙은 멜랑콜리를 낳기도 합니다.


다음날 플로베르는 다시 다음 여행지로, 악어가 득시글거리는 나일 강 유역으로 떠납니다. 여행자의 본분은 그저 떠나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죠.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며 떠나는 것은 언제나 슬픈 일”이라는 것, 그러나 “여행에서 가장 유익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쓸쓸한 감정”이라는 것, 나른한 관조 가운데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 그것은 책상 앞에만 머물러서는 결코 알 수 없던 것, 훗날 『보바리 부인』에 재현될 섬세한 감수성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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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 초판
"카이로에 돌아오자 강렬한 지적 욕구가 폭발하는 느낌이 들었어. 갑자기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쓰고 싶어 안달이 나는 욕구를 느꼈지."